X선생의 과학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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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영남의 代作, 그리고 과학계 김정영(선임연구원, 한국원자력의학원) 2016-06-08

 

 

 

  오랜 방송생활으로 친숙하고 자유분망한 이미지를 가진 가수 조영남씨의 대작(代作) 사건은 미술계를 넘어 대중에게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가수라는 직업을 넘어서 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조영남씨는 화투를 소재로 한 독특한 화풍을 소개해 재미와 예술적 감흥을 주어서 더욱 논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춘천지검은 지난 63일에 사기혐의로 조영남씨를 소환수사를 하였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공분을 일으킨 이유는, 진중권 교수(동양)김현정의 뉴스쇼(2016.5.18.)’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같이 회화 대행활동에 대한 정당한 공임비용에 대한 문제였다. 또한 이 인터뷰에서 주목할 만 점은 낭만주의적 예술관념을 넘어 현대미술에서 대행 또는 대작은 콘셉트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X-선생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사실 과학연구를 하면서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우리가 아는 미술은 대부분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고흐, 고갱 등과 같이 육체적 한계를 넘어 고독하게 그림을 그리는 이미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시대에 예술을 혼자 하는 이들이 많을까,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리 일상에 보편화된 예술인 영화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를 보면, 감독이나 배우를 넘어서 정말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나 참여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엔딩 크레디트이 자막으로 올라가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대개는 멋진 영화 주제곡이 흘려 나온다). 이 영화 작품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고 해서, 오늘날 영화의 질적 평가가 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자된 영화를 블록버스터(blockbluster)라고 해서 대대적인 광고를 한다. 그렇다면 현대음악은 어떠한가. 음악 역시도 훌륭한 가수, 작곡가, 작사가, 악기연주자, 편집자, 엔지니어 등이 모여서 만들면 음악적 가치는 더욱 상승한다. 요즈음 음악방송에서 연주자나 코러스에 대한 이름을 다 보여주고, 그들을 기억하게 한다. 조만간에 가수 뒤에서 가수를 돋보이게 하는 많은 댄서들도 이름을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같이 현대예술은 첨단기술이나 규모면에서 매우 세련되고 커졌음으로, 많은 이들의 노력과 열정이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는 왜 회화만 유독 혼자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투자로서 회화가 아닌 보고 즐기는 예술로서 회화는 여러 명이 협업하는 현대예술의 개념이 들어가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오히려 고전적인 예술개념은 작품에서 주연급에게만 언론의 조명이 비추어지고 금전적인 대가도 더 크게 돌아감으로서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우리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자리 잡은 열정페이(熱情 pay: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줬다는 구실로 청년 구직자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위키백과)가 가장 뿌리 깊게 내린 곳이 예술분야이다. 이 열정페이는 일부 개인이나 기업에게는 잠시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인적 자원의 손실을 초래한다. 여기서 X-선생은 생뚱맞게 과학계의 열정페이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물론 오래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과학계는 일찌감치 열정페이가 존재하였고, 현재도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현대 과학은 첨단 실험기기가 필요하거나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자본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초기단계에 대학 연구실에서는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많은 금액의 연구비를 받기가 어려운 반면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많다. 그러므로 실험기자재나 실험실 운영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학생들로부터 입금된 월급을 다시 회수하여 재분배를 한다. 이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간 학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실력에 비해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기 마련이고(부족한 실험재료와 기자재를 쓰면서 실험에 계속 실패하는 실험환경), 또한 등록금 조달은 학교의 실험조교 활동을 통해 일부를 보충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앞에 논리에 쉽게 설득당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기서 국가연구비의 비리가 시작된다(‘국립대 교수들, 거액 연구비 유용 무더기 적발’, YTN 뉴스, 2015.5.26.). 이러한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는 일부 연구책임자들이 학생인건비를 가지고 주식투자, 생활비, 병원진료비, 장난감과 콘택트렌즈 구입 등을 하기도 한다(중앙일보, 2015.5.26.). 물론 이것은 대학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국 학생들의 연구노력 및 기여는 고스란히 열정페이로 남겨진다. 조영남 대작 사건에서 불거진 정당한 임금에 대한 논쟁과 오늘날 우리 과학계가 가진 학생인건비 비리가 과연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측면에서 조영남씨는 자신의 작품에 참가한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고, 분명히 자신이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X-선생은 관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제작과정을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가정해도, 판매하는 과정에서 돈을 받았다면 작품의 구매자에게 말을 했어야 한다. 결국 그는 폭넓은 방송을 통해 간간히 회화를 그리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갔고, 작품의 가치는 침묵의 시간만큼 확대되었다. 이것은 2005년 과학계를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황우석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아이디어만 있고 기술적 가치는 학생들이 쌓았지만, 황우석씨는 어느새 모든 영역에서 뛰어난 과학자가 되어 있었고, 그는 국가적으로 많은 혜택도 누리게 되었다. 결국 황우석씨가 혼자서 줄기세포 연구를 절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다.

 

  우리 사회에서 과학을 보는 대부분의 시선은 회화처럼 낭만주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 각인된 고전적인 과학자의 이미지로 인해 항상 혼자 일하는 과학자를 상상하고, 그것이 올바른 과학자라고 믿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과 같이 연구가 시작되면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각인된 것이 많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과학계에서 이미 협업, 통섭, 융합과 같은 키워드는 중요한 연구방법이 되었다. 최근 들어 노벨상 수상자조차도 단독 수상하는 과학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협업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이다. 여러 과학자들이 모인 집단지성의 힘은 위인전으로 알려진 유명한 과학자 한명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사실을 넘어 과학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절대적 방법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러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우리 연구실적 평가방법에서 국제학술지에 게재되더라도 주저자(1저자와 책임저자)에게만 모든 영광이 돌아간다. 결국 2저자 또는 공동저자들은 명예이외는 별다른 혜택이 없다. 이 제도는 나름 합리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공동저자에 대한 책임감이나 향후 연구의 흥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후유증을 포함하고 있다. 요즈음 평가방법 중에 X-선생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논문의 저자수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저자수가 많아지면 논문의 평가점수는 떨어지고, 저자수가 작을수록 논문의 평가점수는 높아진다. 뭔가 이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이다. 이것은 독립적인 연구영역에서 올바른 평가방법일지 몰라도, 협업이나 융합연구 분야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평가법이다. 어떤 연구자의 논문에 공동저자 많은 것은, 그 만큼 연구팀의 협업, 또는 다른 연구팀과의 융합연구가 잘 진행되었다는 증거 아닐까.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예술을 넘어서 과학에서도 대표자가 더 많은 조명을 받고 금전적인 혜택도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올바른 방법이고 지속되어야 할 가치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많다. 세종대왕이 마치 혼자 한글을 만든 것처럼 교과서에 기술된 적도 있었지만, 요즈음 세종대왕과 그가 이끌었던 집현전 학자들의 공로에 대해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글 창제라는 뛰어난 과학적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필요하고, 그 연구팀은 협업과 융합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오늘날 이 논의는 과거의 것만은 아니다. 과학계에 학생들의 열정페이가 사라지고, 공동저자가 공정하게 평가 받는 것만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간결하고 단순한 상식적인 것들, 즉 과학윤리가 실현되었을 때 우리 과학계의 국제적 경쟁력이 만들어지고, 우리 미래의 먹거리를 만드는 원동력을 창조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것과 함께 뛰어난 과학 인력들이 더욱 증가할 것이다.

 

  이미 조영남씨의 대작 사건은 우리 사회에 곳곳에 있고, 그것은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과학계가 이 사건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하는 이유가 되었으면 한다.(20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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