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생의 과학레시피
2016년 11월호 어디로 갔을까 나의 창조경제는 | 한국원자력의학원 김정영박사 | 2016-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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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2일 토요일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모였고, 늦은 오후쯤이 되었을 때 종로 전역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날 언론들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운집한 사람들이 약 100만 명이상 된다고 일제히 보도되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들이 청와대 앞에 모여 세계에서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였다. 국민들은 왜 분노하고 있는가. 일명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희대의 사건은 대통령부터 주요 관료‧기업인들이 ‘최순실의 주변들인’과 연관되어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사적 이익을 취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옆에서 그 권한을 넘는 권세와 이익을 취득한 ‘최순실 일당’의 행각은 조선말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들에게 국가의 안위나 미래는 없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국정이 대통령과 연결된 일부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넘어 한국 사람으로 부끄러움이 크게 밀려온다. ‘최순실 일당’과 관련된 교육, 국방, 경제, 문화 등 전방위에 걸친 비리나 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우리 과학계는 과연 어떠했는가. 현시점에서 X-선생은 지난 과학정책을 돌이켜 볼 냉정한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화두로 던진 ‘창조경제’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실체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앞선 이명박 정부에서는 일본 문부과학성과 유사하게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를 통합하여 과학정책의 도약과 변화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여기에 ‘정보통신기술부’까지 포함시킨 거대조직으로 탄생한 ‘교육과학기술부’로 만들었지만, 이 공룡은 쥐라기 시대를 넘어 기술변화가 빠른 오늘날에, 매우 전문적이고, 매우 복잡한, 교육정책과 각종 기술정책을 국가적으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지나친 기대감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문부과학성처럼 정부 탄생 초기부터 태생적으로 서서히 성장하여 사회에 유기적으로 적응한 조직이 아니었기에,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그 당시 연구현장을 돌이켜보면, 과거보다 연구프로젝트를 수주하기가 어려웠고, 또한 융합연구라는 이름 아래 중복적인 과제항목이 통합되고, 대학과 출연연구소에서 시행되던 많은 기초연구들이 사라졌다. 일부 스타 과학자의 연구팀에게 더 많은 연구혜택이 돌아가는 구조로 우리나라 스스로 과학적 영향력을 축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출연연구소는 연구과제 중심 운영체제(PBS)에 의한 임금문제가 더욱 심각해져서 단기적인 성과만 쫓을 뿐, 장기적인 연구나 신입 연구원의 선발조차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유경쟁체제가 비교적 잘 정착되고 있었던 우리나라 과학 생태계에서 기업을 제외하고, 대학과 출연연구소가 축소된 연구비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모양세가 되었다. 이 경쟁에서 낙오는 대학은 연구 불능을 의미하고, 출연연구소는 월급이 없다는 생존의 위협을 의미했다. 따라서 우리 과학계의 빈곤한 융합연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동거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과학정책에 대해 더욱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현 정부는 ‘교육부’를 다시 독립시켜 환영을 받았으나, ‘정보통신기술부’ 여전히 제자리를 지켰으며 ‘교육과학기술부’는 ‘미래창조과학부’로 바뀌었다. 이렇게 다이어트한 ‘미래부’는 출발부터 과학보다 ‘창조경제’를 지향함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어느 누구도 ‘창조경제’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현재 ‘창조경제’의 정의는 미래부의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보면 ‘국민개개인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IT를 접목하고, 산업과 산업, 산업과 문화의 융합을 촉진해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창조경제’ 정책의 주요한 구성으로 (1)창조경제플랫폼, (2)벤처‧창업 생태계 활성화, (3)미래성장동력 육성으로 나누어지고, 특히 ‘창조경제플랫폼’ 안에는 대통령이 열심히 홍보한 지역별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정부의 과학정책에서 ‘창조경제’는 과거 ‘정보통신기술부’의 IT 개발‧산업화 정책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과학기술이 직관적으로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지닌다. 즉, ‘창조경제’는 과학기술로 바탕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정부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과학은 없었다. 과학자의 발명이나 연구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것일까. 따라서 현 정부의 방향은 기초보다 실용화를 강조하지만, 전체적으로 연구자 기술 중심으로 설계된 연구비는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이런 구조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대기업이 대거 참여하고 투자한 지역별 ‘창조경제혁신센터’가 과연 과학기술발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 왔는가. 다채롭고 아이디어가 빛나는 중소기업의 상품들보다 너무 비싸 구입할 수 없는 몇몇 대기업 상품만 놓인 편의점을 만든 셈이다. 이는 탁상행정의 결과물이라는 생각(파이낼셜뉴스, 황상욱 기자, 2015.01.20)이 지배적이다.
오늘 과학계의 현장 분위기를 되돌아보자. 박근혜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은 19.1조원(2016년)이지만 현장에는 단비가 내리고 있다(왜 장대비가 오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 작은 비로 우수한 작물을 성장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지금은 현장에서 ‘창조경제’이라는 슬로건보다 과학기술의 ‘실용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제 실용화를 하지 않으면 연구프로젝트를 수주하기 힘들기 때문에 정말로 단기성과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창조경제’가 곧 ‘실용화’를 말하는 것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창조경제’는 과학기술 관련 부서가 할 일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는 ‘창조경제’는 자꾸 ‘Dream(꿈)’처럼 느껴진다. 박근혜 정부는 도달할 수 없는 노스텔지아를 만들었고, 그것을 5년 안에 실현하라고 과학인들에게 떠넘기는 것은 아닐까.
최근 과학기술은 같은 기술일지라도 너무나 세부화된 전문적이어서 서로 다른 연구 생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현재의 기술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폭발적으로 사용될지(기술의 잠복기) 예측하기도 어렵다. 과거 반도체나 발광소재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모험적인(심지어 위험한) 투자와 집단연구는 오늘날 최고의 품질을 만드는 핸드폰, TV 등의 커다란 성장동력이 되었다.
현재 요구되는 첨단기술 연구는 기업이 맡고, 미래기술의 연구는 출연연구소가 책임을 지고, 매우 도전적인 연구는 대학이 맡는다면 어떨까. 때로는 서로가 협력도 하고, 때로는 경쟁도 하는, 주제별 집단연구로(연구주제의 중복성이 그렇게 나쁜 것일까?) 자연스러운 과학생태계가 만들어진다면 실용화는 당연한 성과물일 것이다. 또한 단기적인 대형인프라 사업의 육성보다 장기적인 기술인력 중심의 투자에 의한 기술도전의 성공과 실패가 거듭된다면, 재결정되는 단단한 기술력은 진정 우리만의 것이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연구비 투자현황, 네이처, 2016>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과학계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다시 한 번 주변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대학에서는 연구비가 점점 줄었지만 성과연봉제 도입으로 인해 연구 성과를 월급과 연계하여 더욱 재촉하는 분위기로 바뀐다고 들었다. 차라리 선진국들처럼 강의전담 교수(학부 교육)와 연구전담 교수(대학원 교육)를 구분 짓는 것도 방안일 텐데, 우리나라 과학계 교수들을 마블사의 ‘슈퍼히어로’와 같이 키울 생각인 듯하다. 또한 출연연구소는 대학과 중복적인 연구를 피해 실용화 연구주제로 구성되면서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상황으로 되었고, PBS에 의한 임금체계로 인해 연구자들의 직업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다(또한 비정규직 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아울러 기업의 연구자들은 실패에 대한 엄중한 책임으로 인해 도전적인 연구를 기피하고 기존 기술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창조경제’에는 ‘미래’도 없었다.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를 만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력에 대해 스스로 패배의식을 만들어, 그것을 스스로 재단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을 지닌 신진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역량을 잘 성장시키도록 도와주는 게 어떨까.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듯 현장 선진국과 같이 연구자의 아이디어에 의한 ‘국가 연구주제 선정의 확대’와 출연연구소의 신진인력 투자에 의한 ‘과학인력 확보’, 기업의 출연연구소에 대한 투자와 ‘협력연구 강화’ 등은 과학현장에서 매우 절실해 보인다. 정말로 과학자에 의한, 위한 과학정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울러 어느 정권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과학정책 수립이 이제 우리나라 과학계에 싹을 틔우는 시점이 된 듯하다.
대통령이 연관된 ‘최순실 게이트’의 국정농단이 주는 교훈은 몇몇 비전문가나 과학자에 의해 결정되는 단기적인 국가 과학정책 수립보다는, 건실한 국가유지와 발전을 위해 다수의 과학자들의 집단지성에 의한 과학정책이 추진과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지속된 과학의 겨울왕국에 봄이 오려면, 역설적이게도 이제 과학정책의 시계를 10년 전으로 다시 돌린 뒤 다시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을까.(2016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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