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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03월호 경쟁의 시대에 더 치명적인 허위 정보·오정보(misinformation, disinformation) | 한국원자력의학원 책임연구원 조일성 | 2026-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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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위기’라고 하면 전쟁, 금융위기, 대형 재난처럼 한 번에 충격을 주는 굵직한 사건을 떠올린다. 하지만 WEF(세계경제포럼)가 매년 발간하는 Global Risks Report 2026을 읽다 보면, 위기의 본질은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사건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퍼지고 변형되고 증폭되는지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같은 충격이 발생해도 어떤 사회는 비교적 빠르게 수습하고, 어떤 사회는 갈등과 불신이 커지며 피해가 훨씬 커진다. 보고서는 그 차이를 만드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허위·오정보(misinformation & disinformation)를 강조한다. 허위·오정보는 단지 “가짜뉴스가 불쾌하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위험을 더 크게 만들고 더 오래 가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증폭기’에 가깝다.
WEF의 글로벌 리스크 리포트는 2006년부터 매년 발간되어 온 연례 보고서로, 전 세계가 직면한 주요 위험을 단기·중기·장기 시간지평에서 정리하고 위험 사이의 상호연결성을 함께 해석해 왔다. 이 보고서가 꾸준히 인용되는 이유는 위험을 단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들이 서로 얽히며 복합위기(polycrisis)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026년판은 특히 세계가 “경쟁의 시대(Age of Competition)”에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국가 간 협력보다 경쟁이 우선되고, 무역·금융·기술이 힘겨루기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국제질서가 한층 거칠어졌다는 의미다. 이 환경에서는 전쟁과 분쟁 같은 전통적 충격뿐 아니라 제재·관세·수출통제 같은 지경학적 충돌도 늘어나고, 공급망과 에너지 같은 생활 기반의 불안정성이 일상화되기 쉽다.
그렇다면 경쟁이 거세질수록 왜 사회는 더 쉽게 분열되고, 정부의 정책은 더 자주 마비될까. WEF는 이 질문을 “정보의 무결성(information integ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회가 공동으로 발 딛고 서야 할 사실의 바닥, 즉 공통의 현실이 흔들리면, 사건을 해석하고 합의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허위·오정보는 바로 그 무결성을 흔드는 대표 요인이다. 보고서가 제시하는 현재 위험지형에서도 허위·오정보는 상위권(응답 비율 기준)으로 제시되며, 요약(digest)과 보도자료에서도 향후 2년 전망에서 매우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고 언급된다. 이는 허위·오정보가 단지 사회 분위기를 흐리는 부차적 요소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위기를 촉발하거나 증폭시킬 가능성이 큰 핵심 축으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허위·오정보의 진짜 위험은 누군가가 “속는다”는 개인 차원의 피해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회 시스템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공통의 현실이 무너지면 첫째,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둘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실을 믿으며 편이 갈라지고, 의견 차이가 곧 정체성 대립으로 굳어진다. 셋째, 정부나 공공기관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불신이 깔려 있어 실행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결국 같은 충격이 더 큰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이 과정은 “충격 발생→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내러티브 경쟁→허위·오정보 확산→불신과 양극화 심화→정책 마비→피해 증폭”이라는 연쇄 반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허위·오정보는 반드시 처음 충격을 만드는 원인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위기 이후의 사회적 반응을 바꿔 놓고, 대응을 늦추며, 피해의 규모를 키우는 연결고리로 기능한다. 그래서 단순한 사실관계 체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거짓 하나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뢰·협력·정책 실행력이라는 사회의 기본 기능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6년의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다음 충격이 왔을 때, 우리는 그 충격이 허위·오정보를 타고 불신과 양극화로 번지는 것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흥미로운 점은 이 메커니즘이 국제정치나 사회 전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직장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도 ‘거짓정보’는 개인을 속이는 수준을 넘어 조직의 신뢰와 문화, 나아가 실행력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양상은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첫째는 ‘책임전가형’이다. 마감 직전 보고서에 오류가 발견되었는데 실수의 원인이 본인(B)에게 있음에도, B가 “자료를 C가 늦게 줬다”거나 “C가 원래 자주 빠뜨린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흘린다. 이때 팀의 관심은 오류의 원인과 재발 방지로 향하지 않고, 어느새 “C를 믿어도 되는가”라는 인물 평가로 옮겨간다. 사실 확인은 늦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관계와 분위기에 따라 판단하기 시작한다. 공동의 현실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결과적으로 C는 방어적으로 변하고, 다른 구성원들은 “나도 언제든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학습한다. 실수를 공유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으며 문제는 더 늦게 드러나고 더 크게 터진다. 개인의 거짓말이 팀의 학습과 안전을 막는 구조적 손상으로 번지는 것이다.
둘째는 ‘성과가로채기형’이다. 프로젝트가 성공했을 때, 일부 사람이 실제 기여를 흐리게 만들고 자신이 주도한 것처럼 내러티브를 조작한다. 예를 들어 팀이 밤새 해결한 이슈를 두고, B가 상사에게는 “내가 방향을 잡았다”는 식으로 보고하고, 동료에게는 “내가 아니었으면 못 끝냈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겉으로는 큰 다툼이 없을 수 있지만, 이 거짓 정보는 조직문화에 깊은 균열을 만든다. 기여와 보상이 연결된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공정성 인식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협업보다 ‘기록’과 ‘어필’에 에너지를 쓰게 된다. 내부 경쟁이 과열되고 공유가 줄어든다. 정보는 더 이상 공동 성과를 만들기 위한 자원이 아니라 개인 생존을 위한 무기가 된다. 조직은 점점 “같이 일하는 팀”이 아니라 “각자 증명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바뀐다.
셋째는 ‘비방형’이다. 이 형태는 특정 사건이 없어도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조직을 느리게 병들게 한다. 예컨대 누군가의 실수나 성격, 출신, 관계를 과장하거나 왜곡해 “그 사람은 원래 문제야”라는 프레임을 만든다. 비방은 정보를 가장한 감정의 전달이며, 사람을 사실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조직 내 대화는 업무보다 사람 이야기에 더 많이 소비되고, 회의에서 말하는 것보다 뒤에서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공식 채널은 형식만 남고 비공식 채널이 실질 권력이 된다. 그러면 누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해석이 자동으로 따라붙고, 조직은 무엇을 해도 의심받는 상태 — 즉 정책 마비와 유사한 상태로 빠진다. 비방은 예의와 인성 문제를 넘어, 조직을 움직이는 신뢰의 기반을 갉아먹는 ‘문화적 오염’이 된다.
이 세 가지 사례는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공통된 흐름을 갖는다. 어떤 충격(실수, 성과 평가, 인사 변화)이 생기면, 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이야기 싸움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거짓정보가 확산되며, 신뢰와 공정성이 무너지고, 협업과 실행이 마비되고, 결과적으로 조직이 치르는 비용이 커진다. 국제사회에서 허위·오정보가 위기를 증폭시키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래서 직장에서의 거짓정보는 “한 사람의 거짓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조직이 사실을 공유하고 합의하고 함께 움직이는 능력 자체를 손상시키는 시스템 리스크다.
결국 글로벌 리포트가 던지는 질문은 직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음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는 그것이 거짓 정보를 타고 불신과 편가르기로 번지지 않게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회든 조직이든, 지속 가능한 회복탄력성은 완벽한 무오류가 아니라 신뢰의 회복력에서 나온다. 사건은 피할 수 없지만, 사건이 증폭되는 경로는 설계와 문화로 줄일 수 있다. 그 출발점은 늘 같다. 공통의 현실을 지키려는 태도, 그리고 사실과 신뢰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 조직과 시민의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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