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생의 과학레시피
| 2026년 02월호 껍질의 파괴, AI 시대의 방사선의학자들 | 핵의학분과 세부편집장, 핵의학 과장 변병현 | 2026-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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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신해철이 보여준 충격적인 변신
1994년 어느 날, TV에는 우리가 알던 핸섬하고 지적인 발라드 가수 신해철이 아니라 파격적인 옷을 입고 소리를 지르는 락커가 등장했다. 그가 들고나온 ‘껍질의 파괴’라는 곡은 당시 대중에게 신선함을 넘어선 충격 그 자체였다. 잘 나가던 꽃미남 가수의 자리를 스스로 던져버리고 왜 굳이 그 험난한 길을 택했을까?

[1집 앨범자켓(왼쪽)과 ‘껍질의 파괴’ 발표 후 공연 당시 신해철(오른쪽)]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다가는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 그리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찾으려는 갈망이 섞인 고통스러운 탈피였다. 판독실 모니터 앞에서 AI 알고리즘의 분석 결과를 기다리며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는 우리들의 모습이 30년 전 그의 고민과 참 많이 닮아 있다.
망치를 들었던 직조공과 모니터 앞의 우리
역사를 보면 인간의 고민은 늘 비슷하다. 18세기 산업혁명 때 영국 직조공들은 증기기관이 돌아가는 방적기를 보고 망치를 들었다(러아디트 운동). 내 밥그릇을 뺏어가는 저 기계만 없으면 예전처럼 잘살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러다이트 운동: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며 저항한 운동(출처: 제미나이로 생성)]
오늘날 우리도 비슷하다. “AI가 판독을 다 하면 의사는 뭐 먹고 사나?”라는 걱정이 술자리 안줏거리로 올라온다. 클릭 한 번에 장기 윤곽을 따주는 자동 분할(Segmentation) 기술이나, 병소를 콕 집어내는 알고리즘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쏟은 수련 기간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망치를 들었던 직조공들이 결국 기계의 속도를 이기지 못했듯, 우리도 AI라는 도구 자체와 싸우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기술에 먹힐 것인가 기계를 부릴 것인가?
산업혁명 때 망치를 들었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지만, 기술의 흐름을 읽고 그 위에 올라탄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발 제조업자였던 리처드 아크라이트다. 그는 기계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새로 나온 방적기 기술을 눈여겨보고 이를 대량 생산에 적용해 '현대적 공장 시스템'을 설계했다. 결국 그는 평범한 가발 제작자에서 당대 최고의 자산가이자 산업의 거물로 거듭났다.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1771년에 방적기 50대 규모로 만든 수력 방적공장(출처: www.steamheritage.co.uk)]
기술에 잡아먹히느냐, 기술을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가느냐의 차이는 아주 사소한 관점 변화에서 시작된다. 성공한 이들은 기술을 ‘경쟁자’가 아니라 ‘비서’로 대했다. 단순한 노동은 기계에 맡기고, 사람은 기계가 판단할 수 없는 전체 공정의 흐름을 짜거나 품질을 관리하는 영역으로 올라갔다. AI 시대의 방사선의학자도 마찬가지다. AI와 판독 정확도 내기를 할 게 아니라, AI가 내놓은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어떤 것이 환자에게 진짜 의미가 있는지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계산은 AI에게 해석은 우리에게
단순히 병소를 찾는 일은 이제 AI에게 기꺼이 넘겨주자. 대신 우리는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환자에게 어떤 치료가 최선일지 고민하고, 방사선 생물학적 원리와 임상 지식을 결합해 AI가 해내기 어려운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환자의 과거력과 기저질환을 고려해 영상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나아가 최적의 치료 방침과 추가 검사 플랜을 어떻게 제시할지가 앞으로 방사선의학자의 유능함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전 세계 AI 의학영상 분석/판독보조 기업 리스트(출처: 제미나이로 생성)]
아크라이트가 단순히 기계를 만진 사람이 아니라 기계로 세상을 바꾸는 '시스템 설계자'가 되었듯, 우리도 검사 수치 너머의 환자 상태를 살피고 치료의 큰 그림을 그리는 ‘의과학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파편화된 정보를 모아 하나의 완성된 치료 전략으로 엮어내는 능력, 그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증명해야 할 진짜 실력이다.
아픈 만큼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
신해철은 껍질을 깨고 나와 비로소 ‘마왕’이라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만약 지금 AI 때문에 불안하고 내 미래가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아주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변화에 무관심한 사람은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껍질을 깨는 건 살이 찢기는 것처럼 아픈 일이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방사선의학이라는 익숙한 알을 깨고 나와 AI라는 날개를 달아보자. 지금 겪는 이 혼란과 고통은 우리가 다음 차원의 전문가로 진화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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