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생의 과학레시피
| 2025년 08월호 결핍이 쏘아올린 혁신, 사이클로트론이 암 치료의 미래를 연다 | 핵의학분과 세부편집장, 핵의학 과장 변병현 | 2025-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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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불을 찾아서, 라듐의 시대와 그 한계
20세기 초, 인류는 마리 퀴리가 발견한 원소 라듐(Radium)에 매료되었다. 어둠 속에서 영롱한 빛을 내뿜는 이 신비로운 물질은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기적의 원소’로 여겨졌고, 곧 ‘라듐 열풍’을 일으켰다. 라듐이 함유된 물, 화장품, 의약품 등 소위 ‘방사성 가짜약’들이 시장에 넘쳐났다. 그러나 이 눈부신 약속 뒤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듐 걸스(Radium Girls)’ 사건이다. 1920년대, 시계 문자판에 야광 페인트를 칠하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은 붓끝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입으로 빠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양의 라듐을 섭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턱뼈가 녹아내리는 ‘라듐 턱(radium jaw)’과 같은 끔찍한 질병에 시달리다 고통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위험성뿐만 아니라, 라듐은 의학적 활용에도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우라늄 광석에서 추출하는 과정은 매우 비효율적이었고, 희소성으로 인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의료계는 라듐의 희소성과 위험성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했고, 이는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통제 가능한 새로운 방사선원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로 이어졌다.
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 바로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이었다. 1929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는 본래 핵물리학 연구를 위해 이 장치를 개발했지만, 그의 동생이자 의사인 존 로렌스는 그 의학적 잠재력을 간파했다. 사이클로트론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 방사성 동위원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37년, 존 로렌스는 사이클로트론으로 생산한 인-32(P-32)를 이용해 적혈구증가증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하며 인류 최초로 인공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질병 치료의 시대를 열었다. 이는 자연에서 '발견'하는 시대에서 필요에 따라 '설계하고 만드는'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알파 핵종 부족과 사이클로트론의 귀환
한 세기가 흐른 지금, 핵의학계는 과거 라듐 시대와 놀랍도록 닮은 위기와 기회에 동시에 직면해 있다. 이번에는 ‘표적 알파 핵종 치료(Targeted Alpha Therapy, TAT)’라는 혁신적인 암 치료법이 그 중심에 있다. TAT는 액티늄-225(Ac-225)와 같은 알파선을 방출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암세포 표적 분자와 결합시켜 암세포만을 정밀 타격하는 기술이다. 알파 입자는 베타 입자와 달리 매우 짧은 거리 내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전달하여, 주변 정상 조직 손상은 최소화하면서 암세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특히 여러 치료에 실패한 전이성 거세저항성 전립선암(mCRPC) 환자를 대상으로 한 초기 임상 연구에서 Ac-225 기반 치료제는 놀라운 항암 효과를 입증하며 전 세계적인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치료법은 과거 라듐처럼 심각한 공급 부족 문제에 직면해 있다. 현재 전 세계 Ac-225 공급량은 과거 핵 연구 과정에서 생성된 토륨-229(Th-229)의 붕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는 한정된 양의 낡은 재고에 의존하는 매우 불안정한 공급망으로, 연간 생산량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데 그치는 수준이다. 이로 인해 대규모 임상시험과 치료법의 보편화에 심각한 제약이 따르고 있다.
이러한 현대판 '라듐 위기'를 해결할 열쇠는 다시 한번 사이클로트론에 있다. 사이클로트론은 라듐-226(Ra-226) 표적에 고에너지 양성자 빔을 조사하여 Ac-225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또한, 의료용 사이클로트론을 지역 거점 병원이나 생산 시설에 설치하면 '현장 생산(on-site production)'이 가능해진다. 이는 소수의 글로벌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의 안정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생산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핵의학의 새로운 도약, Ac-225 생산 허가를 받다
1930년대 로렌스 형제의 사이클로트론이 라듐의 한계를 극복하고 핵의학의 새 시대를 열었듯,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이클로트론이 알파 핵종 부족이라는 세계적 난제를 해결하고 암 치료의 미래를 여는 열쇠로 다시 등장했다. 최근 한국원자력의학원이 이룬 쾌거는 대한민국이 미래 암 치료 분야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은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의료용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인 Ac-225을 생산하고 이를 의약품으로 제조하는 것에 대한 국내 최초 허가를 획득했다.
이 성과는 대한민국 핵의학과 바이오 산업에 지대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이는 첨단 의료 분야에서의 기술 및 의료 주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이정표다. 지금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던 Ac-225을 자체적으로 안정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불안정한 글로벌 공급망과 지정학적 변수로부터 우리 국민의 치료 기회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는 국내 바이오 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점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Ac-225의 국내 생산은 방사성 의약품 신약 개발의 핵심 원료를 국산화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국내 제약 및 바이오 기업들은 이제 이 핵심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독자적인 표적 항암 신약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궁극적으로 이 성과의 최종 수혜자는 바로 난치성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다. 기존 치료법에 반응하지 않던 말기 암 환자들이 생명 연장의 꿈을 꿀 수 있는 표적 알파 핵종 치료에 대한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의 Ac-225 생산 허가는 하나의 성공 사례를 넘어, 대한민국 핵의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선언과도 같다. 과거의 역사를 교훈 삼아 미래의 개인 맞춤형 암 치료 시대를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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