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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사선의학을 기대하며핵의학분과 세부편집장, 핵의학 과장 변병현2020-06-04

‘월드베스트’라는 구호

어릴 적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을 만나면 종종 이야기하는 추억이 있다. 1990년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교 앞 전자대리점 쇼윈도에 전시된 대형 TV에서 매일같이 우리나라 모 전자회사가 ‘월드베스트’가 되겠다는 광고를 내보내던 즈음이었다. 당시 우리는 툭하면 카세트테이프가 엉켜버리고 앞뒤 빨리 감기 속도도 느려터진 국산 미니카세트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기 때문에, 대리점 앞을 지날 때마다 그 광고가 얼마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인지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에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뭔가 어른스럽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나서였던 것 같다. ‘월드베스트’가 되겠다던 전자회사는 더 이상은 그런 광고카피가 필요 없을 정도의 세계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 전자회사 혼자만의 분전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안되겠지?”, “그것은 무리야”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일을 목격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BTS가 내는 앨범마다 빌보드차트를 휩쓸고, 한 번에 수만 명씩 입장하는 그들의 월드투어가 판매시작과 동시에 매진되는 일은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 가능한 거의 모든 종류의 상을 휩쓸었다.

이런 일들은 물론 당사자들의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의 역량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1960-70년대 기업들도 밤낮없이 일했고, 그 시절 목소리를 틔우겠다며 폭포소리에 맞서 노래연습을 하다가 성대가 망가진 가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우리나라 기업이나 개인이 세계를 휩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먹고 살기조차 막막하던 나라 살림이었지만 과도할 정도의 교육열로 배출해낸 뛰어나고 열정 넘치는 인재들이 기업에 대거 입사하였고, 매력적인 문화상품을 배출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시스템도 차근차근 갖추어 갔다. 요컨데, 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 간 기업과 개인의 노력이 전 세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온 것이다.

 

K-진단키트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자랑할만한 것이 최근에 하나 더 생겼다. 코로나19 진단키트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진단키트 수출액은 올해 2월 64만달러 수준이던 것이 4월에는 2억달러를 돌파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전세계적인 수요증가를 공급량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지만 진단키트 회사로서는 인력충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니, 일부 업체에서는 연구소직원들까지 제품포장작업을 돕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진단키트가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선은 탄탄한 기반기술을 꼽을 수 있다. 올해 초에 생명과학 분야에서 오래 근무하신 공무원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업무 특성 상 국내 생명과학 기술개발동향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파악하실 수 있었는데,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여러 분야들 중에서도 특히 진단키트 분야의 국내 기술수준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셨다. 이 때만 해도 코로나19가 아직 이슈가 되지 않고 있었으니, 이 말이 단지 코로나19 진단키트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탄탄한 기반기술 못지 않게 이번 콜로나19 진단키트의 성공에는 정부의 역할도 컸다. 즉, 코로나19의 염기서열이 공개된 직후 질병관리본부에서는 국내 회사들을 대상으로 신속한 진단용 검사제품을 만들 것을 권유하였고, 새로 만들어진 진단키트에 대한 평가를 공동으로 시행한 것이다. 특히 중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진 올 2월 초, 질병관리본부가 긴급사용승인제도를 이용하여 업체들이 빠르게 진단키트를 개발 및 실용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이다.

 

K-방사선의학을 기대하며

전 세계 방사선의학 시장규모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방사선치료 시장은 연평균 6.7%의 성장률을 보여서 2020년에는 81억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이며, 방사성의약품 시장도 연평균 8.0%의 성장률을 보여 2020년에는 60억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PET, MRI, CT 등 의료진단기기가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방사선기기 시장규모는 더욱 커서, 2022년 시장규모 692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된 국내업체들도 꾸준한 기술축적을 통해 해외진출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고, 실제 수출로 이어지고 있는 분야들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 방사선의학산업이 세계시장에 널리 진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능을 구현하는 수준의 기술개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수출과 사업화로 원활하게 연결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지점에서 K-진단키트의 성공사례를 거울삼아, 정부와 업체 및 학계가 힘을 모아 실용화가 시급하고 국내 제반 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 갖추어진 분야들을 찾아 집중 지원하고, 해당기술의 임상적용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규제간소화 정책이 요구된다 하겠다. 대한민국이 ‘K-진단키트’를 만들어낸 것처럼, ‘K-방사선의학’이라는 히트상품을 만들 날을 기대해본다.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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