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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정성의 원리- 2002년, 실험실에 어느 화학자의 변명 김정영(선임연구원,한국원자력의학원)2019-02-26

 

  복잡한 실험기구가 즐비한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의 모습만큼 답답한 현실도 몇 안 된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소설 속에 과학자는 항상 외롭고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나르시즘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된다. 과학 내에 세부적인 분야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겠지만, 화학자에게 있어 앞선 일은 흔한 일상이다. 보이는 것을 인식하느냐 하지 못하냐는 질문이전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분자들의 세계를 상상하여 머릿속으로 그려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등을 비롯해 담론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것처럼 원자와 분자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조작하고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가는 일은 화학자에게 주어진 부담감이면서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정체성이다. 이와 같이 가능성이 없거나 미지의 세계를 분석하고 창조하는 일이 과학자를 억누르는 실체 없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실험실은 타인으로부터 멀어진 고립된 곳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그 안을 들어다 보면 인간적인 면들이 숨 쉬고 있다.

 

과학적 변명

  1920년대 독일의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수학적 과정을 통해 불확정성의 원리, 즉, ‘어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라는 원리를 증명하였다. 이는 현재 널리 통용되고 있는 화학의 이론적 패러다임 중들에 하나이다. 한 번도 과학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이야기가 어려울 수 있으나, 쉽게 받아들이자면, 이 전의 화학은 어떤 입자에 대한 성질 등을 비롯한 정보를 불변의 결과 값(숫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근사적으로 입자에 대한 사실을 얻을 수 있을 뿐, 그것이 입자에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진리라고 말하지 못 한다’라는 가설을 만들었다. 흔히들 과학적 지식은 명쾌한 사실이고 레고(장난감 블록)처럼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기 쉽고, ‘과학적’이라는 말은 합리적·논리적·이성적이다 라는 말과 동등한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알고 보면 아주 크나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부터 배워온 수학은 비논리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설사 가정교육으로부터 배운다 할지라도), 현실성 없는 숫자놀이에 지쳐 그 의미조차 우리 스스로 질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수학에서 숫자가 지닌 의미를 규정하고 인정해 왔다. 0은 언제나 0이며, 1은 언제나 1로써 존재함을 인정하고, 수학적 전개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정의를 부정하면 수학은 어떠한 전개도 펼칠 수가 없다. 조금만 생각하면 계산의 허점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2x+1을 x에 관해 미분하면 2가 된다. 그러나 이를 다시 적분하면 2x+a라는 숫자가 되는데, a는 불확실한 숫자인 문자로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2x+1과 2x+a는 같다’라고 말할 수 없다. 시작에 관계없이 결과 값은 일치하지 못한다. 같은 숫자를 가지고 미분과 적분만 오고 가더라도 내부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이는 10이라는 숫자 앞에 0.1은 너무나 작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는 근사법에서 비롯된다. 이 근사적인 방법은 수학적 명료성이 지닌 오류를 막는 보호막과 같다. 이 보호막은 큰 것에 대해서는 존재를 인정하고, 작은 것에 대해 존재를 부정한다. 아니 없음으로 간주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너무 쉽게 접하는 컴퓨터 운영체계 중에 MS사의 윈도우도 운영 도중에 내부오류 메시지가 나오지만, 확인 표시만 마우스로 눌러주면 어떤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컴퓨터 전반적인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거대한 무언가에 대해 작은 존재가 어떠한 체계 내에서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원리가 2차원의 영상으로 나타난 사례들 중 하나이다. 과학은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혹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작은 존재에 대해 매우 인색하다. 특히 화학은 더 작은 단위로 들어가지만, 그 안에서도 몇몇 존재는 부정되기도 하고 추측이 진실로 많이 남는다.

 

< (좌)하이젠베르크와 (우)미국의 911 테러 >

 

논리적 후회

  다시 실험실로 돌아온다. 복잡한 실험기구와 화학자는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실체(있다는 것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미세 입자들)를 되새김질하며, 건축가처럼 원자와 분자의 구조를 무수히 만들어간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 외롭고 답답한 장면이 그저 단순한 흥미를 위한 묘사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얼마 전에 의약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잡다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반응식을 생각하면서 그것뿐이라 단언하며 조작했지만, 아주 단순한 실험반응식 A+B → AB가 되지 않고 새로운 C로 탄생한 것이다. 몇 주에 걸친 실험이 감행되었으나 이유는 끝이 없는 미로와 같았다. 밤새워서 접근해 보기도 했고, 실컷 잠을 자고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실험해 보기하고, 운동을 통해 기분전환으로 처음부터 진행시켰지만, 아주 단순한 원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너무 된다는 믿음이 강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과학적 자존심이 발동해서, 한 달이 다 되어갈 즈음 어느 날은 하다가 지친 심신으로 인해 일찍 실험실에서 벗어났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려고 할 때 뉴스에서 긴급 속보가 들렸다. 맨하탄 쌍둥이 빌딩 항공기 테러 수백 명 사망, 곧이어 수천 명 사망, 미국은 불현듯 터진 이 사건에 빈 라덴의 조직 ‘알 카이다’를 지목하였고, 뉴스는 이틀 밤낮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사태수습에 정신이 없었고, 세계는 빌딩에 민간 항공기로 자폭한 이 테러에 대해 입장을 정리해 나갔다. 영화 속에서 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흥미나 재미가 아니라, 그것은 죽음과 가족의 해체라는 무서운 인간적 고뇌를 사람들에게 안겨 주었다. 순식간에 맨하탄은 가족을 잃은 사람의 눈물이 가득 매었다. 한동안 주간지와 일간지는 이 사건으로 온통 뒤덮었다. 이런 바깥세상과 분리된 필자의 실험실 역시 흔들렸지만, 그것을 모르는 원자와 분자들은 자신의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실험을 되지 않았고, 원인을 찾은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특히 막힐 때마다 읽는 영문 논문의 속독 솜씨도 빨라졌다.

 

  다시 바깥세상은 테러 보복조치로 행해지는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관심을 두었다. 연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명분도 없어 사라져 가는, 그 드넓은 사막은 미사일 구멍으로 홈을 만들어 나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폭격과 병사의 총소리는 그 나라를 덮으리라. 무릇 전쟁이라 함은 컴퓨터 게임과 달라서 생명이 오고 가는 뼈아픈 고통이다. 이렇듯 한 걸음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세상은 실험실에 있는 필자에게 화학의 미시 세계와 동일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심오하게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삶에 공통성을 찾아내는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더라도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을 떠 오릴 수 있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명확하게 밝히는 시도에서,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일반적인 사실을 유추하려는 작업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만, 미묘하고 하찮아 보이는 무언가를 잊어버릴 수 있다. 만일 그 작은 무언가가 매우 중요한 이유라면, 원자가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단백질을 이루고, 단백질이 사람을 이룬다면...

 

  천동설이 무너지고 지동설이 그 머리를 들어낼 때처럼 진리를 굳게 믿는 확고한 의지 때문에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문제, 사회조직 간의 갈등 역시 큰 신념간의 충돌이다. 만일 두 가지 동시에 결정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확고한 진리를 부정한다면 어떨까. 물론 다소 혼란을 감소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혼돈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떨어지는 물을 담는 그릇 안에 물은 소용돌이치지만, 어느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찾아간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공통성과 일반성을 끄집어내고 통계학적으로 수치적으로 산출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미국의 전쟁과 테러나 필자의 실험 모두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신념들 때문에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사실에 대해 부정하기 싫어하고, 쉽사리 믿고 숫자놀이에 변화의 가능성을 버리는 일들이야말로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고 때문이다.

 

다시 쓰는 반응식, 혹은 삶의 공식

  나의 반응식에 대해 재고할 의지는 없었는지, 그 안에 벌어지는 무수한 화학의 현상을 단 한 줄의 지식과 생각으로 줄여서 생각하려는 우둔한 마음, 이와 비슷하게 종교의 신념, 우월한 국가를 만들려는 마음, 폭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 무엇보다 작은 것에 대해 절대적 멸시를 보내는 시선들... 우리가 사는 확신의 시대는 이러한 과학적 오류들로 가득하다. 컴퓨터가 계산하고, 인터넷이 정보를 종합하고, 전문가가 학문을 조종하는 일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절하게 대응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사라져 가는 작은 것들(인간적인 모든 문화)은 오류로써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입자를 이해하며 접근하지 못했기에, 단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판단한 성급함이 실험의 긴 시간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보다 큰 세계에서 많은 일 역시 또 다른 면을 보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살아온 삶을 드라마처럼 연속적으로 나열할 수 없듯 신념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리듬과 같을지 모른다. 미사일 방어 사업으로 방어막을 자랑하던 미국이 하루아침에 폭격을 맞듯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그 무엇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한참으로 떠들다 보니 실험실도 차분해 진다. A+B는 처음부터 AB가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오류는 매우 작은 것(화학적 환경)에 비롯된 것이었다. 거대한 우주도 알면 알수록 신비하고 경이롭지만, 이 미시적 세계 역시 장막에 둘러싸인 자연의 산물이다. 그 사이에 있는 우리 역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떠도는 물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 있는 신념은 그럼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어느 구절처럼 확실하고, 정답을 찾아다니는 인간의 행보는, 그 근원부터 잘못된 기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 런지. 우리는 서로의 신념을 강요하는 것보다 한 번쯤 서로를 인정하며 이해하는 삶을 살아볼 필요가 있다. 한때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던 시대는,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같은 아픈 역사를 남겼다.

 

  확실한 과학의 시대에 과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로부터 만들어졌다. 광고나 텔레비전의 비호로 점점 일반화를 걷는, 이 시대에 한 번쯤 작은 목소리, 자신과 반대의 발언에 귀 기울려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더 우리에게 확실성을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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