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선의학의 창

본문글자크기
  • 서울대학교 핵의학과 정준기 교수- 서울대병원 정준기 교수, 핵의학자의 삶을
수필집‘33년의 연가’에 담다!

    서울대학교 핵의학과 정준기 교수- 서울대병원 정준기 교수, 핵의학자의 삶을
    수필집‘33년의 연가’에 담다!

  우리나라 핵의학에서 1990년대는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1993년 의료법 개정 후 핵의학이 독립 진료과목으로 인정되고 1995년에는 법적으로 핵의학 전문의 제도를 도입한 의미 깊은 시기다. 핵의학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단기간 내에 핵의학 강국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초석이 되었던 90년대, 당시 핵의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 해 온 전문가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신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내외 핵의학 분야 권위자로 손꼽히는 서울대학교 핵의학과 정준기 교수 역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국내 핵의학의 성장과 발전과 궤를 함께 해 온 정준기 교수를 만나 그가 노래한 ‘33년의 핵의학 연가’를 들어보았다.

▶ 내과 전공의에서 세계적인 핵의학 권위자가 되기까지

정준기 교수 사진

  올 8월 정년퇴임을 앞둔 그는 1978년-1982년 동안 내과 전공의 과정 중 지도교수인 故고창순 교수의 권유로 핵의학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1985년 서울의대 내과학교실 전임강사로 발령 받아 1988년 2월부터 1989년 8월까지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방사성동위원소 표지 항체를 이용한 진단 및 치료를 연구하면서 본격적인 핵의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핵의학의 미래와 중요성을 발견한 정교수의 후일담이다.

  “제가 핵의학을 선택할 당시만 해도 내과가 의학의 주류라면 핵의학은 하나의 가지였다”고 회상하는 정교수는 “주류에서 벗어나 곁가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의외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핵의학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귀국 후 정교수는 1998년부터 11년간 핵의학과장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2009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의학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분자영상, 방사성핵종 유전자치료, 항체를 이용한 방사면역신티그래피, 방사면역치료 등의 핵의학·분자영상학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준기 교수는 1999년 갑상선암에서 FDG PET의 연구로 미국핵의학회에서 ‘탁월한 임상연구상’을 받았으며 나트륨-옥소 공수송체(sodium-iodide symporter; NIS)를 리포터/치료 유전자로 이용하는 데 있어 세계 최고의 대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에 관한 JNM 종설 논문은 현재까지 350번 이상 인용 되었다. 또 정교수는 2009년에는 대한의학회에서 시상하는 바이엘쉐링 임상의학상을 수상하여 핵의학을 임상의학 영역으로 확고히 다진 공로를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정교수가 33년간 작성한 SCI급 논문 300여 편은 핵의학 연구자들로부터 14,000회 넘게 인용되면서 세계 최고의 핵의학분야 석학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 글 잘 쓰는 의사? 또 다른 이름은 수필가

  지난 6월 정준기 교수는 오는 8월로 예정된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수필집 ‘33년의 연가’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정준기 교수의 33년 교수생활과 스승님 이야기, 의대와 병원에서 맺은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의료계에 몸담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기록되어 있다.

  유년시절부터 감수성이 풍부하고 내성적이었던 정준기 교수는 문과적인 성향이지만, 평생 월급쟁이로 사셨던 아버지는 의사의 길을 강권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의사의 삶과 희생, 사랑에 대해 그려낸 이광수 작가의 ‘사랑’이라는 장편소설을 읽고 감동하여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에서 그려낸 것처럼 의학도가 되어 연구도하고 봉사도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산다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한 정준기 교수는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로서의 삶을 착실하게 걸어가게 되었다.

  이 소설은 의대를 졸업한 후에도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내과 의사가 되고 의학연구를 하기 위해서 핵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의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힘써온 정준기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젊은 히포크라테스를 위하여>, <소소한 일상 속 한 줄기 위안>, <참 좋은 인연>, <의학의 창에서 바라본 세상> 4권의 산문집을 그동안 출간하였다. 그는 의학도이자 연구자 그리고 수필가로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독특한 문체로 담아 의료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이런 일련의 왕성한 문학 활동도 “사실은 소설 ‘사랑’의 의사 주인공인 시인이었다는 내용에 암시를 받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정준기 교수 사진

정준기 교수 사진

▶ 정년의 선물이 된 국내 핵의학의 세계적 위상

정준기 교수 사진

  1960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방사성동위원소 진료실이 신설된 이후 핵의학분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1980년대 말까지 핵의학 분야는 양적 팽창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술수준은 아직까지도 낙후돼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양질의 균형적 성장을 위해 1986년부터 핵의학회를 중심으로 전문의 제도를 논의했고 10년간의 진통을 겪은 끝에 1995년 전문과목 신설을 위한 ‘전문의 수련 및 자격 인정에 관한 규정 개정령’을 통해 핵의학 전문의 제도가 신설, 확립됐다. 이때부터 핵의학계는 새로운 모멘텀을 맞게 되었다.

  “제가 처음 핵의학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핵의학은 후진국 수준이었다.”고 회상하는 정준기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핵의학 기술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해, 세계 3~4위의 논문발표 편수를 자랑하고 연구와 임상이용에서 미국, 독일, 일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핵의학 4강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핵의학을 보면서 이 역사에 동참한 사람으로서 매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한핵의학회 이사장, 한국 PET협의회 회장, 심장핵의학연구회 회장, 분자영상의학회 회장, 대한갑상선학회 회장 등 국내 요직을 비롯해 세계핵의학회 사무총장, 아시아지역핵의학협력기구 사무총장 및 의장, 아시아분자영상협의회 회장, 세계분자영상학회 집행위원, IAEA 핵의학 및 분자영상 협력센터장 등을 역임한 정준기 교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단시간 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우리 핵의학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힘써 왔다. “다양한 국외활동을 통해 핵의학·분자영상학 관련 정보와 트렌드를 공유할 기회가 많았다.”고 말하는 정교수는 “세계 각국에 핵의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저와 우리 핵의학의 경험을 보다 많은 국가와 공유하고 싶어서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을 돌며 100여 차례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고 회상한다. 또한 2006년에 세계핵의학회, 2014년 세계분자영상학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해 국제적 리더로도 활략하고 있다.

  끝으로 후학들에게 담기고 싶은 메시지에 대해 ‘기본에 충실하자’라고 말한 정준기 교수는 “어떠한 연구든 처음에는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기본을 지켜가며 끊임없는 노력하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찾아내며 연구를 지속하다보면 조금 더디더라도 목표에 달성하기 마련”이라며 “어떤 선택하는가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길, 자신의 것에서 훌륭한 성과를 얻으면 선택을 잘한 것이 된다.” 정교수는 결론적으로 “가치라는 것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부산

    교수님! 최고의 교수님! 존경합니다

    2018-07-30 23:03:24

  • 광주

    존경합니다.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2018-08-06 15:29:47

  • 미국

    교수님,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11-30 02:35:13

  • 서초

    갑상선암 하나 제재로 치료도 못해 환자가 사망하였는데도, 책임이나 사과 한마디 없었습니다.

    2023-12-09 20:19:44

  • 덧글달기
    덧글달기
       IP : 44.200.40.97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