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선의학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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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IH 최초의 한인 핵의학 과학자 백창흠 박사 - 미래 방사성의약품 연구 경쟁력, 서로의 ‘Bridge’가 되어 새로운 시너지 창출해야

    NIH 최초의 한인 핵의학 과학자 백창흠 박사 - 미래 방사성의약품 연구 경쟁력, 서로의 ‘Bridge’가 되어 새로운 시너지 창출해야

환자들의 맞춤치료의 기반이 되는 방사성 표지 항체치료 연구 및 치료기술 연구에 집중해 온 전 미국립보건원(NIH) 수석연구원 백창흠 박사는 스스로를 ‘Bridge’라고 소개한다. 연구 성과를 높이기 위해 다학제 기반을 조성하고, 연구자들이 최적의 시스템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노력해 온 그는 40년 넘게 미국에서 학자로, 연구자로 누구보다 충실하게 ‘Bridge life’를 실천해 왔다. 본고에서는 우리나라 핵의학 선진화에 기여해 온 한인 최초의 NIH 핵의학 과학자 백창흠 박사를 만나 ‘방사성 의약품 연구자’의 삶을 들어보았다.

▶ 유학, 고난의 끝과 새로운 희망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5~60년대 혼란의 시대에도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고 대학에 진학했던 백창흠 박사는 대학교 3학년 때 일어난 4.19혁명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한국사회의 문제와 다른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백 박사는 유학을 결심하고 그 전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 입대를 서둘렀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당시 서부전선에서의 군 복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의 비호아래 평범한 일상을 보냈던 백창흠 박사는 군 생활을 통해 그 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고통을 겪게 된다. “모진 훈련 등으로 고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과거에 내게 주어졌던 기회와 혜택이 얼마나 컸고 소중했는지 알게 되었다”는 백 박사는 “지식은 변화되는 환경에 따라서도 깊은 깨달음을 준다”며 힘든 환경을 겪은 탓에 유학에 대한 열망과 함께 ‘누구보다 열심히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인생 지침까지 얻게 되었다고 한다.

▶ 24시간 공부로도 부족했다.

군 제대 후 유학길에 올라 ’68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에 입학한 백창흠 박사는 이곳에서 물리적 유기화학(반응기전)을 공부하게 된다. 한국에서 화학공학 학위를 받았다고는 해도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이공계 학과에서는 전공서적 없어 교수의 강의에 의존해 지식을 쌓았으며, 그나마 있었던 전공서적은 영어 원서로 되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환경에서 학위를 받고 유학 온 백창흠 박사가 미국 학생들과 비교해 학업이 뒤쳐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교수 강의도, 전공서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내용도 본론은 고사하고 서론만 겨우 이해하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당시 해외 유학생들은 낙제하면 본국으로 쫓겨나는데, 미국 대학 입학 후 2개월 만에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고 회상한 백 박사는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포기할까 하는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도포기를 고민하던 찰라 백 박사의 마음을 돌린 것은 군 시절의 다짐이었다. 이후 백 박사는 잠자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온 종일 공부에 매달리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고, 이해를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수나 학생들에게 물어가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 학자가 되기로 마음먹다

부단한 노력한 끝에 학문의 깊이를 깨닫게 된 백창흠 박사는 ‘학자’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을 두고 존경할 은사를 만나 롤 모델 삼아 ‘진정한 학자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 다시 노력을 이어갔다. “지식의 깊이와 사고의 다양성, 그리고 진취성까지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갈고닦다보니 학자의 길에 차츰 다가서게 되었다”는 백창흠 박사는 1976년 조지 워싱턴 방사성 의약 화학 조교수로 들어가면서 학자의 길을 구체화시켰다.

이후 백 박사는 조지 워싱턴 의대 방사화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방사성 의약품 연구 분야에서 학자로서의 경력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경험도 넓히게 되었다. 특히 조지 워싱턴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4~5년간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종양 검출 및 치료를 위해 방사성 표지 항체를 합성하고 사용하는 방법 등을 협업연구하는 과정에서 NIH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게 된다.

▶ 한국인 최초의 방사성 의약품 과학자

NIH와 협력연구를 통해 우수한 성과를 이끌어 낸 백창흠 박사는 1989년 NIH 임상센터의 핵의학 부서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생화학, 면역학, 약리학, 생리학 및 방사 화학 등 다양한 연관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전임상시험 경험까지 갖춘 백창흠 박사는 어느새 NIH에서 탐내는 전문가로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이다. “당시 NIH 핵의학 임상센터에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취급하는 사람을 필요로 했고, 내가 동물실험 경험까지 갖춘 것을 알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고 회상하는 백 박사는 핵의학/방사선과 및 영상의학 연구소 수석 과학자(Executive)이자 방사성의약품연구실 책임자로 NIH에서 연구 방사성 약학 및 항체 방사성 의약품 연구부문을 이끌며, 환자맞춤치료의 기반이 되는 항체치료 분야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 한국과학자에게 NIH 연수의 기회를 제공한 ‘bridge’

“내가 NIH행을 결정한 가장 큰 계기는 좋아진 연구 인프라로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회상하는 백창흠 박사는 ‘보다 가치 있는 연구’를 통해 환자를 돕고 정부와 학계, 연구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NIH 선택의 결정적 계기라고 설명한다. 백 박사는 자신의 연구가 의학계 더 나아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개인의 ‘공(功)’을 키우기보다는 ‘연결고리(bridge)’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수많은 한국의 핵의학 전문의의 연수를 돕고, 선진 핵의학 및 방사선 관련 정보를 공유해 우리나라 핵의학 발전에 기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80년대 말 우리나라의 핵의학, 방사성의약품 기술수준은 낙후돼 있었다”는 백창흠 박사는 “미국, 독일, 일본 등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핵의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NIH 소속 과학자들 역시 미국의 핵의학 관련 학술대회에서 논문 한편 발표하지 못하는 한국의 과학자들에게 관심조차 없었다”며 “이러한 배경에서 ’80년대 말 우리나라의 몇몇 기관에서 NIH에 의료인력들을 연수시키고자 했을 때, 거의 매번 응답이 없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당시 조지 워싱턴 대학 교수로 NIH와 협력연구를 하던 백창흠 교수는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워 NIH 담당자에게 한국 과학자들의 우수성을 설파하여 연수를 수락해 줄 것을 요청해 ’8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과 정준기 박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NIH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기대 없이 연수를 승인했던 NIH 측에서 정준기 박사의 놀라운 업무 및 연구 능력에 크게 만족해했으며, 이후 한국원자력의학원 핵의학과 임상무 박사와 최창운 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과 정재민 박사 등 매해 1~2명의 한국 과학자들에게 NIH에서 연수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 한국 핵의학의 선진화에 기여한 ‘bridge’

우리나라의 핵의학 발전은 그야말로 비약적이었다. ’90년 이전까지 국제무대에서 논문 한 편 발표 못했던 우리나라는 NIH에서 기술연수를 받은 정준기 박사가 90년대 초 처음으로 해외 논문을 발표한 이후 꾸준하게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또한 NIH를 비롯한 미국에 진출한 한인 핵의학 전문의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백창흠 박사는 이 시기에 연구개발 성과 확대를 위한 ‘bridge’를 넘어 모국의 핵의학 발전에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bridge’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한인 핵의학 전문가들을 주축으로 ‘한인핵의학회’를 설립하고 ’92년부터 ’98년까지 7년간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00년까지 2년간 회장직을 수행하며 한-미간 핵의학 학술교류에 노력해 왔다. 이와 함께 ’97년부터 ’99년까지 NIH ‘한인과학자협회’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과학자들간의 교류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들이 밑거름이 되어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논문을 많이 발표할 정도로 연구 및 학문수준이 높아졌다.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단시간 내에 학문과 기술이 발전한 나라가 없을 정도”라고 말하는 백창흠 박사는 “세계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핵의학 성장을 놀라워했으며, 한국이 21세기 핵의학 학문을 영도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의 시선과 기대도 적지 않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특히 백 박사는 “기대를 현실로 바꾸기 위해선 ‘한국의 역사관’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핵의학 불모지에서 학문을 발전시켜 온 선배들의 노력을 항상 되새겨 ‘나를 비추는 거울, 나의 가치 있는 행동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시키는 ‘bridge’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은퇴 후 더욱 바빠진 삶과 꿈꾸는 미래

백창흠 박사는 이미징 및 치료용 방사성 표지 단일 클론 항체, 방사성 표지 항체 등 방사성 의약품 연구에 매진하며 7권의 저서와 141편의 논문을 공동집필한 바 있다. 올해 6월 30일 28년을 근무한 NIH에서 은퇴하고 현재는 NIH의 자원 봉사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 백 박사는 “앞으로도 나의 행동이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나를 비롯한 모든 선후배 핵의학 전문의•과학자들이 환자와 학문, 산업을 밝게 비추는 거울이 되어 후배양성과 치료효과 높은 기술개발에 매진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백창흠 박사는 원자력병원이 임상시험 기반 연구(Clinical study base Research)를 선도하는 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환자와 연구자, 사회와 정부, 제약산업을 연결하는 ‘bridge’ 역할이 중요하다며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는 지났다’며 모두가 서로의 ‘bridge’가 되어 긍정의 시너지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Bill JKim

    백 박사 수고에 또수고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계속 조국의 후배들을 위헤 또 인류의 건강을 위해 수고 하시는 백 박사의 모습이 친척을로서 자랑 스럽습니다.
    Ronnie and David 그리고 백 박사 가정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 합니다.
    주님 은혜안에서 김정환.

    2017-10-25 09:39:10

  • Esther Kwon

    무한 사랑하고 존경하는 큰 삼촌
    우리 가족과 모두에게 축복이시며 자랑이십니다...영원히 주님의 무한 축복만이 외숙모님함께 승욱 승진이 온가족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7-10-25 09:39:10

  • Choon Yoon

    백 박사님의 업적이 한국과 전세계의 방사선 의학 발전에 위대한 bridge 역할이 되어 놀라운 효과가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항상 조용히 성실과 겸손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연구하시는 백 박사님 정말 존경합니다

    2019-01-26 2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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