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생의 과학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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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나의 케미스트리여! (부제: 故김태정 교수님을 추모하며)김정영(선임연구원, 한국원자력의학원)2017-02-08

 

<故김태정 교수의 강의 모습, 대한화학회 2016년 4월>

 

  핵의학이 뭐죠? 방사성동위원소가 뭐죠? 방사성의약품이 뭐죠? 그게 어떻게 암을 진단하거나 치료하죠? 등등,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가을에 故김태정 교수님(1948년 12월 ~ 2017년 2월, 경북대학교 응용화학과)과 첫 만남은 악수가 끝나마자 시작된 수많은 질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실 X-선생은 앞의 질문들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같은 과학자라도 설명을 시작하면, 내용이 어려워 끝까지 듣고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물론 X-선생의 설명이 매우 고루하고 부족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설명하면 그 쉬운 연구를 왜하냐는 질문을 받으니, 비록 어렵더라도 깊이를 더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 과학계 종사자은 종종 특이한 학문에 대해 일반인도 공감하는 수준의 설명을 요구받지만, 결국 일반인의 공감을 얻어내는 순간 그 주제는 연구 가치를 상실하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또한 이 딜레마는 과학기술 관련 연구과제를 기획하는 정부 관료들이나 그것을 평가하는 심사위원들(동료 과학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故김태정 교수님은 60대의 적지 않은 나이에 불구하고, 마치 16좌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처럼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탐구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번은 그의 요청으로 X-선생은 ‘방사성의약품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강의를 했었는데, 강의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은 졸거나 딴청을 하는 반면에, 그는 노트를 꺼내 강의내용을 완벽하게 정리했고, 심지어 본인의 아이디어도 첨가하여 적어 넣었다. 강의 내내 겸손한 질문과 함께 깊은 답변을 요구하는 진정한 청강생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가수가 콘서트에서 열렬한 관객의 반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듯 X-선생은 더 많은 과학적 흥미와 도전과제를 쏟아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방사성의약품에 관련된 주요한 논문을 찾아내어 파일로 만들고, 각 논문들마다 형광펜과 띠지를 활용하여 중요한 이론이나 기술에 대해 표시한 여러 파일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토대로 우리는 낮 시간 내내 토의를 했다. 중간에 점심식사마저 온통 새로운 학문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그는 새로운 과학기술에 도전할 충분한 에너지와 노력을 겸비했고, 무엇보다 방사성동위원소로 암을 조기 진단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아직도 그의 강렬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이처럼 그는 새로운 학문 앞에서 자신의 나이를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가끔 그는 낮 시간이 부족하여 X-선생에게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농담 섞인 어투로), 이 요청을 체력고갈로 동의한 적은 없었다(이제는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렇다고 그의 대화가 지루하거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수평선을 달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스펀지처럼 X-선생의 지식을 빨아 들은 뒤 새로운 아이디어를 다시 내뿜었기에, 그와의 대화 내내 엔돌핀이 분비되었다.

 

  요즈음 사회상을 고려하면, 그는 나이로 인해 세대 간에 격차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목사님(기독교)으로도 활동했기에 보수적인 교수님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하지만 X-선생과 수차례 만남에서 종교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합리적인(또는 과학적인) 주장이면 수용할 줄 하는 진보적인 화학자였다.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분자 개발에 매진한, 그는 지난 10년 동안만 새로운 의료용 금속착물 관련 50여편 논문에서 화학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그가 처음부터 의약품 개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화학과를 1976년에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1978년), 캐나다로 건너가 브리티쉬 콜롬비아대학교에서 화학박사(1984년)를 받은 뒤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에서 1년간 박사후 과정을 끝내고, 1986년에 경북대학교 응용화학과에 자리 잡았다. 故김태정 교수는 광촉매, 상자성 분자영상용 조영제, 디스플레이용 유기전자재료 및 정밀화학제품 개발을 위한 분자촉매 개발 등에 연구를 수행하다가, 같은 학교에 재직 중인 장용민 교수(핵자기공명학 전공)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MRI나 CT에 사용되는 의료용 분자영상조영제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의 폭넓고 풍부한 금속착물 합성경험은 가돌리늄 등과 같은 희토류 금속을 이용한 MRI 조영제 합성에서 굴지의 실력을 발휘했고, 마침내 2011년 6월에 기존의 MRI 조영제보다 성능이 향상된 새로운 가돌리늄 기반 신규 조영제를 하나제약(주)에게 기술 이전하는 데 성공하였다(이 기술이전에 대해 수익금보다 그는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늘 이야기했다). 또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원자력의학원 RI융합부와 함께 종양 진단 및 치료용 방사성의약품 연구에 참여하여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보여주었다(그에게 추가적인 기회가 있었다면 획기적인 결과가 탄생했으리라 확신한다). 그가 말년에 방사성의약품 연구에 과학자로서 애착을 보인 것은 그의 전립선암 유발과 무관치 않았다. 그는 전립선암을 치료하면서도 논문 읽기와 새로운 의약품의 아이디어 개발을 놓지 않아서, 건강만 회복되면 곧잘 공동연구자들에게 연락했었다. 이처럼 그는 병마와 관계없이 언제나 아이디어와 의약품 합성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에 대한 열정은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우리 과학계에서 다양한 연구 분야에서 활동 중에 있다.

 

  요즈음 그의 존재가 우리 과학계(사회)에서 유달리 빛나는 이유는 학벌이나 나이 같은 유교적인 관습을 벗어던지고, 연구미팅 때마다 선배 과학자의 역량으로 연구자들 간의 접착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점이다. 마치 콘트라베이스 같은 그의 리더십은 조용한 울림을 만들어 난제 속에서 해결점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타인의 소리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화학자이며, 원자와 원자의 결합을 디자인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진정한 케미스트(Chemist)라 할 수 있다.

 

  2016년 4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대한화학회에서, 그는 은퇴기념으로 무기분과에서 생애 마지막 특강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일궈낸 새로운 금속착물들과 그것과 관련된 다양한 합성기술(성공과 실패 사례)을 후보 과학자들에게 설명했으며, 그와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한 동료 과학자와 제자의 역할과 능력을 빼놓지 않고 소개했다. 이 강의를 통해 그가 희토류 금속 중 가돌리늄(Gd) 화학의 세계적인 대가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라듐(Ra)이 퀴리부인의 상징이듯, 가돌리늄을 한동안 그를 상징하는 원자가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이 강의에서 죽기 직전까지 종양치료용 방사성의약품을 개발하겠다고 공언도 했다. 물론 X-선생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알고 있었다. 만약 더 우수한 항암치료법이 있다면, 그는 언제든 새롭게 공부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는 나이를 잃어버린 케미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68세의 나이로 2월 5일에 우리들 곁을 떠났다. 어쩌면 하느님은 좀 이르게 그가 필요로 했나 보다. 앞으로 화학적 난제를 유쾌하게 상의할 선배가 없다는 아쉬움과 새로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갈 동료가 사라졌다는 두려움이, 그가 떠난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는 진정한 학자의 모습을 지닌 분이며, 미래를 제시하며 책임지고 결단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 준, 그의 삶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이제 원자주기율표에서 가돌리늄을 볼 때, 가돌리늄을 지독히 사랑한 케미스트 김태정의 삶과 철학을 기억할 것이다.(2017.2.10)

  • Hans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많이 배웠습니다.

    2017-02-08 15: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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